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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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이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되며,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내용 파악이 어렵지만,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은 문언문으로 작성되었으나 한국어식 어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와 유사한 수사학적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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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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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중원 고구려비 |
원어 이름 | 충주 고구려비 (한국어) |
로마자 표기 | Chungju Goguryeobi |
상세 정보 | |
종류 | 비석 |
재료 | 돌 |
폭 | 55cm |
높이 | 2.03m |
제작 시기 | 5세기 후반 |
위치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 (용전리 280-11) 고구려비전시관 |
문화재 정보 | |
지정 번호 | 국보 제205호 |
지정일 | 1981년 3월 18일 |
시대 | 삼국 시대 고구려 |
소유 | 국유 |
2. 역사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에 발견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이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6] 건립 시기는 5세기 후반 장수왕 때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유사하며,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7] 비문은 문언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2. 1. 발견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되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6]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6]충주시는 고구려 시기에는 남부 거점인 국원성(國原城)이었으며,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뒤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1956년 - 1994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불린다.
비석이 발견된 1979년 당시에도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사면에 예서체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7] 마모가 심해 비문의 내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2. 2. 건립 시기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되었다.[6] 건립 시기에 관해서는 5세기 전반 광개토왕 때의 학설[5]부터 6세기 평원왕 때의 학설까지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5세기 후반 장수왕 때 축조되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이 비석은 고구려가 장수왕 시대에 한반도 중부를 정복한 후 남한강을 따라 일련의 고구려 요새를 건설한 것을 기념한다.2. 3. 명칭
1979년 발견 당시 비석이 있던 장소가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1956년~1994년)였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불린다.[6]2. 4. 보존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되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6]충주시는 고구려 시기에는 남부 거점인 국원성(國原城)이었으며,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뒤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충주가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1956년 - 1994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흔히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한다.
비석이 발견된 1979년 당시에도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사면에 예서체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7] 마모가 심해 비문의 내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충주 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10월 기준으로 현재 '''충주 고구려비'''가 있던 자리에는 전시관이 설립되면서 원본도 전시관 내로 옮겨졌다.
원래는 사면 모두에 비문이 새겨져 있었으나, 수 세기에 걸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는 앞면의 일부와 한쪽 면만 판독이 가능하다. 1981년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3. 비문의 내용 및 특징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충주 고구려비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비면 마모가 심해 비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6]
비문은 문언문으로 작성되었지만, 중국어의 주어-동사-목적어 어순 대신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1] 광개토대왕릉비와 수사학적으로 유사하며, 고구려 관료의 위계를 언급하고, 신라를 "아우"로 지칭한다.[5]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 | 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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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中高麗太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尙□上共看節賜太翟𨛃□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甲寅東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중국어 |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
□□□中□□□□城不□□村舍□□□□□□□沙□□□□□□□□□班功□□□□□□□□節人□□□□□□□□□辛酉年□□□十□□□□□太王國土□□□□□□□□□□□□□□□□□□□□□□□□ □□□□□□□□□上有□□酉□□□□東夷寐錦土□□□□□□方□桓□沙□斯色□□古𨛃加共軍至于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中 …… 城不 …… 村舍 …… 沙…… 班功 …… 節人 ……중국어 |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행 전체 마모)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에 이르렀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
3. 1. 형태 및 재질
1979년 비석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을 그대로 비석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사면에는 예서체 글씨가 1행 23자꼴로 528자 새겨져 있다.[7]3. 2. 내용 분석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이 발굴한 충주 고구려비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비면 마모가 심했으나, 화강암 비석 사면에 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 내용은 마모로 인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7]비문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형제에 비유하면서도, 고구려 왕을 "대왕"으로, 신라 왕을 "동이(東夷)지매금[1]"으로 표현하여 양국 간의 위계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신라 관료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신라 영내에서 300명을 징발하여 고구려 군관 지휘 하에 둔 기록을 통해, 장수왕 시대 고구려가 신라를 종속시켰음을 보여준다.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중국어가 순수한 중국식 한문으로 쓰인 반면, 충주 고구려비는 신라어의 영향을 받은 표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6세기 신라의 영일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 신라비와 마찬가지로, 신라가 한자를 수용하면서도 자국어에 적합한 표기로 변형하여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3. 3. 언어학적 특징
이 비석은 문언문으로 작성되었지만, 중국어에서 발견되는 주어-동사-목적어 어순 대신에, 한국어 및 기타 여러 동북아시아 언어에서 발견되는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의 몇 가지 사례를 포함하고 있다.[1] 비문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형제에 비유하면서도, 고구려를 "대왕"으로, 신라 왕을 "동이(東夷)지매금[2]"으로 칭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매금 이하의 관료에게 의복을 하사한 것과, 신라 영내에서 300명을 징발하여 고구려 군관의 지휘 하에 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한반도 내에 세력을 확장하여 신라를 종속시켰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는 순수한 중국식 한문으로 쓰여 있는 데 반해, 충주 고구려비는 정복지 신라 백성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 신라어의 제약을 받은 표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설명된다. 6세기 신라의 영일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 신라비가 마찬가지로 신라어적인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함께, 신라에서는 한자를 수용하여 사용했지만, 한문 표기에 대해서는 자국어에 적합한 표기로 바꾸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판본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1],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 '''원문''':五月中高麗太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尙□上共看節賜太翟𨛃□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甲寅東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행 전체 마모)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于伐城)에 이르렀다.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 '''원문''':□□□中□□□□城不□□村舍□□□□□□□沙□□□□□□□□□班功□□□□□□□□節人□□□□□□□□□辛酉年□□□十□□□□□太王國土□□□□□□□□□□□□□□□□□□□□□□□ □□□□□□□□□上有□□酉□□□□東夷寐錦土□□□□□□方□桓□沙□斯色□□古𨛃加共軍至于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中 …… 城不 …… 村舍 …… 沙…… 班功 …… 節人 ……}}
5. 현대적 의의
1979년 충주 인근의 입석리에서 발굴되었다.[1]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를 정복한 후 남한강을 따라 일련의 고구려 요새를 건설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2]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유사하며, 고구려 관료의 위계를 언급하고 있고, 신라를 "아우"로 지칭하고 있다.[2][3] 1981년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2] 비문은 문언문으로 작성되었지만, 한국어 및 기타 여러 동북아시아 언어에서 발견되는 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의 몇 가지 사례를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어에서 발견되는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은 아니다.[1][4]
참조
[1]
문서
寐錦
蔚珍鳳坪碑
1988
[2]
서적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
신원문화사
2006
[3]
웹인용
문화공보부고시제489호(문화재지정)
http://theme.archive[...]
1981-03-18
[4]
뉴스
중원 고구려비, 세계문화 유산 추진- SBS
https://news.sbs.co.[...]
[5]
뉴스
40년 논란 충주 고구려비에서 '397년(영락7년)' 명문 읽었다…제2의 광개토대왕비가 확실
http://news.khan.co.[...]
[6]
웹사이트
충주 고구려비
2013
[7]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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